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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으며


길을 걸으며

세상은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느리고,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쁜 일상 속에서 나는 자주 걷는다. 그리고 걸을 때마다, 마치 시간이라는 것이 내 발걸음처럼 천천히 지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길을 걷는 일이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나를 돌아보는 시간으로 느껴진다.

어릴 적, 나는 걷는 것에 대해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학교에 가거나 집에 가거나, 나는 그저 목적지를 향해 걷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저 발을 움직여야 했고, 그 길이 끝날 때까지 걷는 것이었다. 그때는 아무리 길이 길어도 그 자체로 의미를 두지 않았다. 시간은 항상 나를 쫓아가고, 나는 그저 그것을 피하려고 서두르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 길 위에서 나는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간단한 발견이었다. 골목길에서 지나치는 작은 꽃들, 문틈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길가의 오래된 나무들. 그런 것들이 나를 잠시 멈추게 만들었다. 그동안 너무 바빠서, 너무 급하게 지나쳐버렸던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오늘도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린 후, 공기에는 여전히 비 냄새가 가득했다. 그런 날씨 속에서 길을 걸으면, 세상이 더욱 고요해지는 것 같다. 거리의 소음도, 사람들의 발걸음도, 평소보다 훨씬 더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 고요한 순간들을 만끽했다. 그리고 문득, 내게 이렇게 많은 고요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너무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스스로를 놓치고 만다. 내 안의 고요와 평화를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잊어버리기도 한다.

한참을 걷다 보니, 문득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 역시 각자의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발걸음도 나와 같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내게 어떤 의미를 남기고 있을까? 나는 그들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그 이야기가 어느 순간 나와 교차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꼈다. 우리가 길 위에서 마주칠 때,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길을 걷는 일은 단순히 나 혼자만의 여정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의 교차점이 된다.

길 위에서 나를 돌아보는 일은, 그동안 지나쳐온 시간들을 다시 돌아보는 일과 같다. 가끔은 길을 걷다가 문득 지나간 시절이 떠오른다. 내가 젊었을 때, 친구들과 함께 다녔던 길, 첫사랑과 손을 잡고 걸었던 거리, 부모님과 함께 떠났던 여행의 길. 그 길들은 그때의 나를 그대로 품고 있다. 그리고 그 길을 다시 걸을 때마다 나는 그때의 나로 돌아가게 된다. 그때의 기분, 그때의 생각,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동안 지나온 삶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보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도 나는 길을 걸었다. 무심코 지나쳤던 돌멩이 하나가 내 발목을 잡았고, 그 돌멩이를 보고 있자니 어릴 적 나와 함께 걷던 친구가 떠올랐다. 그 친구는 이제 먼 곳에서 살고 있지만, 그 돌멩이 하나로 그 시절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길을 걷다 보면, 그 길 위에 쌓인 기억들이 하나둘씩 살아나곤 한다. 그때의 웃음소리, 그때의 대화들, 그리고 함께 했던 순간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길을 걷는 것은 결국 나와 세상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길 위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나누며, 내 삶의 일부분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들이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은, 내게 큰 위로가 된다. 우리는 모두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이해하려 한다. 길은 끝없이 이어지지만, 그 끝에 도달하기까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들이 바로 우리 삶의 동반자임을 느끼게 된다.

오늘도 나는 길을 걸었다.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자, 세상과 만나는 시간. 그 길 위에서 나는 또 한 번, 자신을 발견하고 세상과 소통하며, 조금 더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리고 그런 힘이 바로 길 위에서 나 자신과 만나는 순간, 나에게 주어지는 선물임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