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지나간 자리
어느덧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면, 나뭇가지 위로 붉고 노란 잎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간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면, 나무들은 가벼운 몸짓으로 흔들리며, 그 속에서 삶의 흔적들을 드러내는 것 같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를 떠올리며, 나는 그 속에서 나의 지난 날들을 다시 돌아본다.
어린 시절, 나는 매일같이 바람을 따라 뛰어다녔다. 그때의 나는 바람과 하나였고, 바람은 나에게 세상의 끝까지 데려다 줄 것만 같았다. 바람이 불어오는 대로, 나는 그 흐름을 타고 어디로든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요한 여름날, 들판을 가로지르던 바람 속에서 나는 끝없이 웃었고, 작은 꽃잎들이 나의 머리카락에 살며시 앉을 때면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 양 행복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바람이 주는 의미는 조금씩 달라졌다. 어른이 되면, 바람은 더 이상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었다. 바람은 종종 내 마음을 흔드는 존재가 되었고, 때때로 그 바람은 내 속을 파고드는 쓸쓸함의 표시로 다가왔다. 바람이 불 때면 나는 자연스레 마음이 울컥해졌다. 그때마다 나는 "왜 이렇게 바람이 차가운 걸까?"라고 되물으며, 그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늘 내 마음속에 남겨진 여운이 있었다.
바람은 그저 지나가는 것일까?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지는 것들이 있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는 비어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자리에 살아 있는 것들이 있다. 바람은 모든 것을 휘감고 지나가면서도, 그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나무의 뿌리는 그 자리에 그대로 뻗어가고, 떨어진 잎은 땅속에 섞여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저 공허한 빈자리가 아니라, 여전히 세상과 맞닿은 자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지나온 자리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돌아보면 내가 지나온 길은 늘 바람처럼 순간순간 휘몰아쳐왔다. 때로는 너무 급하게 지나가서 내게 남겨지는 것이 없을 때도 있었고, 때로는 너무 오래 머물러서 내가 지치게 만들기도 했다. 그 바람이 불던 순간들 속에서 나는 때로 행복했고, 때로는 고독했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것은 그 순간의 감정들, 그리고 내가 그때 느꼈던 마음이었다.
바람은 멈추지 않는다. 계속해서 불어온다. 그 흐름 속에서 나는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다. 지금은 어쩌면 과거의 바람이 나를 이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바람이 지나간 자리를 지나치면서, 나는 내 자신을 돌아본다. 오늘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도, 언젠가 지나갔던 바람이 남긴 흔적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곳일 것이다. 내가 지나온 모든 순간들이 결국 하나로 이어져, 이곳에 나를 세운 것이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 자리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지나간 시간, 놓쳐버린 순간들,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이 모여서 나를 만들어갔다. 이제 나는 그 바람의 흔적을 따라가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는다. 바람은 계속해서 불어오고, 그 바람에 따라 나는 또 다른 자리를 지나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그 자리를 소중히 여길 것이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것들은 결국, 내가 나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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