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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나무들


흔들리는 나무들

가을의 끝자락, 바람이 차갑게 불어오는 날에 나는 산책을 나섰다. 일상에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머리 속을 맑게 하고 싶어서였다. 언제나 그렇듯, 내가 자주 찾는 길은 한적한 공원이었다. 그곳은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에 충분히 조용하고, 나무들이 우거진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세상의 시끄러움을 잠시 잊을 수 있다.

그날, 공원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반긴 것은 언제나와 다름없이 수많은 나무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길게 뻗은 은행나무였다. 그 나무는 여름 내내 푸르렀다가 가을이 되자 한꺼번에 노란 잎을 떨어뜨리며 그늘을 만들었다. 가을이 되어 은행나무는 더욱 뚜렷한 모습을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나무들이 조금씩 내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길을 걷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흔들리는 나무들, 그 모습이 어쩌면 내 삶과 닮아 있지 않을까? 가끔은 자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흔들리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것도 없이 조용히 서 있기만 할 때도 있지만, 그런 시간들조차도 결국 지나가면 다시 일어설 힘을 주지 않던가. 내가 걸어온 길도 그렇고, 앞으로 나아갈 길도 그렇다. 바람에 흔들려도 결국 다시 뿌리를 내리고 서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길 양옆에는 가을을 맞이한 다른 나무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벚나무도 있었다. 벚나무는 다른 나무들에 비해 늦게 꽃을 피운다. 봄이면 그 화려한 꽃들이 마치 봄을 알리는 신호처럼 피어나지만, 가을에는 대부분의 나뭇가지가 텅 비어있다. 그런 벚나무는 그 자체로 신기한 존재였다. 다른 나무들은 여름을 지나 가을에 접어들면 예쁜 단풍을 남기는데, 벚나무는 왜 그런지 그 어떤 색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 모습이 더욱 고요하고, 고독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나무도 언젠가는 다시 꽃을 피우고, 새로운 잎을 돋아낼 것이다. 봄이 되면, 아무리 힘들었던 겨울을 이겨낸 벚나무가 다시 세상을 밝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계속해서 걸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세 걸음. 내 발밑으로 떨어진 낙엽들이 바람에 휩쓸려 작은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나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을은 항상 나에게 지나간 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여름은 바쁘고 뜨겁지만, 가을은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때마다 나는 자연스럽게 내 인생의 일부 순간들을 떠올린다. 그리움과 아쉬움, 후회와 기쁨, 모두가 섞인 감정들이 밀려온다.

가을, 그리고 바람. 두 가지의 힘은 언제나 내 삶의 중요한 순간을 기억하게 해준다. 바람은 내게 지나간 시간을 상기시키고,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또, 가을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변하는 시기라는 것을 알려준다. 나무들은 낙엽을 떨어뜨리고, 땅은 그것을 받아들여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나는 그 과정을 보며, 나도 내 삶에서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지,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생각해본다.

그러다 나는 다시 은행나무 앞에 섰다. 잎이 많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그곳에 서 있는 나무는 고요했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며 버티는 모습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그 나무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 나무가 겪었을 많은 시간을 떠올렸다. 나무는 뿌리를 깊게 내리고, 많은 계절을 겪으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도 그러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나만의 뿌리를 잃지 않는 존재가 되기를 바랐다.

길을 끝까지 걸어가면서 나는 어느새 그 나무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다짐을 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시간들, 그리고 그 시간들을 지나면 얻어질 나의 모습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는 조금 더 깊은 마음으로 자연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처럼, 나도 앞으로 나아가면서 흔들릴 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갖기 위해, 나는 내 뿌리를 더 깊게 내리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나를 지탱해줄 것임을 믿으며.

언제나 그렇듯, 나는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기로.